행복을 찾으려 했다. 즉 내가 모든 면에서 존재론적으로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바로 그것이 최고의 행복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떤 존재의 존재론적인 완전성은 자기에게 고유한 일을 가장 잘 수행 할 때 실현된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자신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마지막인 최고의 목적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윤리학 전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최고의 목적을 ‘최고선(最高善)’이라는 단어를 섰다. 즉 최고선을 행복이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마지막인 최고의 목적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윤리학 전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최고의 목적을 ‘최고선(最高善)’이라는 단어를 섰다. 즉 최고선을 행복이라
다르다는 것이다.
5) 그들의 삶을 통해 판단해 보건대, 다중들 특히 대단히 통속적인 사람들은 좋음과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이러한 그들의 생각일 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은 세 가지 인데, 삶과 정치적 삶 그리고 셋째로 관조적인 삶이 그것이다.
그것에 때문에 선택하는 것, 바로 그것을 ‘선(좋은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어떤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대개 비슷하다. 즉, 보통 사람이나 교양 있는 사람이나 모두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 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마지막인 최고의 목적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윤리학 전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최고의 목적을 ‘최고선(最高善)’이라는 단어를 섰다. 즉 최고선을 행복이라
행복을 아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후자는 ‘과학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것을 통해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인간 삶의 풍요를 가져오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거기에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자연관 역시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물리학적 자연
우리는 그의 환희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다. 종의기원 이 끼친 파문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의 환희는 가히 인류적인 것이었다. 공간과 시간은 맹목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는 적자가 되기위한 투쟁의 장일 뿐이라. 실로 다원의 발견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우리가 좋다/나쁘다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 자체에 가치 부여를 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대하는 인간의 영혼의 상태가 선악을 가르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또 다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도 통념상의 좋음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조절하는 성품을 길러낼 때 행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한
행복 또는 쾌락이 최고의 행위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칸트학파 윤리학은 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결국 그들은 인간이 행위를 할 때는 무엇이 나에게 좋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무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윤리학 정